피고인 권리 보호하면서 피해자 권리는 알아서 챙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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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가 된 피해자] (하) 박탈당한 피해자 알 권리

수사부터 기소·재판 이르기까지
피해자 알 권리는 철저히 배제
CCTV는 수사 중 이유로 비공개
피의자 개인정보는 비공개 대상
재판부 허락 없인 기록도 못 봐
당사자 사건마저 방청객 전락
공정한 사법 위해 알 권리 필요
삽화=류지혜 기자 birdy@


형사사건의 수사부터 송치, 기소, 재판, 선고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범죄 피해자의 알 권리는 배제된다.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마련된 법과 제도는 견고한 울타리가 돼 피해자를 사건의 본질에서 자꾸 밀어낸다. 피해자의 정보 접근권은 보복 범죄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회복적 사법(범죄 이해 당사자들이 모여 범죄 영향, 피해 회복, 그 범죄가 가지는 함의를 도출하는 과정)’ 실현을 위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법정에서 배제되는 피해자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 여성은 재판이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무차별 폭행을 당할 당시의 CCTV 영상을 보게 됐다. 사건의 당사자였지만 형사재판 과정에서 CCTV나 가해자 진술 등의 증거를 확보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개인정보 유출 위험을 안고 민사 소송을 따로 걸 수밖에 없었다.

검사와 피고인이 대립하는 형사재판에서 범죄 피해자는 제3자에 불과하다.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변호를 맡은 법률사무소 빈센트의 남언호 변호사는 “형사소송법은 검사 이외의 제3자가 피고인의 인적 사항이나 범죄 사실, 증거 등을 취득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며 “피해자도 제3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소 이후에는 피해자와 피해 사실이 확정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피고인의 방어권만큼이나 피해자의 방어권 행사 또한 중요하게 인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재판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열람·등사 청구권’이 있지만 1~2장짜리 검찰 공소장이나 종류만 나열한 증거물 목록에만 국한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마저도 피해자가 신청한다고 무조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판부가 허락해야 하기에 재판부의 성향에 따라 열람 여부나 범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재판부가 피해자를 증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방청석에 앉아 자신의 사건을 ‘관람’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필요할 경우 피해자나 피해자 측 법률 대리인을 검사 측 좌석에 앉혀 진술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자는 의견 등이 법조계에서 꾸준히 나왔지만 실제로 이뤄진 변화는 없다.

■“피해자 알 권리 우선해야”

‘초량동 노래주점 폭행’ 사건은 아직 경찰 수사 단계지만, 돌려차기 사건과 유사한 전철을 밟을 확률이 높다. 피해 모녀는 보복 범죄의 두려움으로 생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가해자 무리가 어떤 이들인지 알 길이 없다. 도리어 가해자 측에서 피해자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건다거나 경찰에 연락처를 물어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경찰은 현행법과 내부규정에 따라 피의자 정보를 피해자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피의자라 할지라도 사생활의 비밀이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수사기관 밖으로 공개해선 안 되도록 규정돼 있다. 일부 수사서류를 피해자에게 제공하더라도 비실명 처리 등 강력한 정보 보호 조치가 이뤄진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피해자에게 피의자 개인정보를 알려 줬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지는 일이 종종 발생할 정도다.

피해자의 일상에서 발생한 강력범죄로 피해자의 사생활이나 자유, 인격권 등은 이미 무참히 짓밟힌 상태다. 피의자는 피해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데, 피해자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보복 범죄 등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경찰 관계자는 “법원 판례는 피의자 개인정보를 피해자의 권리 구제에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상 대부분이 비공개 대상 정보에 해당한다”며 “범죄피해평가제도나 심리·법률 상담을 진행하지만, 피해자 측에서 충분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법과 제도의 한계로 인해 경찰 입장에서도 답답한 상황이 생긴다”고 말했다.

■공정한 판단 위해서도 필요

범죄 피해자의 알 권리는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을 줄일 뿐만 아니라, 보다 공정한 형사사법 절차의 진행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피해자에게 적극적인 지위를 부여하면 수사기관이 피해자와 수사 상황,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적절한 방향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시우의 최재원 변호사는 “수사기관에서는 피의자의 진술 등을 피해자 쪽에 전혀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적절한 대응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며 “피의자가 허위 서류를 제출하거나 관계없는 증거 자료로 시간을 끌면서 수사를 회피하면 피해자 측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못 하면서 시간만 흘려보내는 답답한 사례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CCTV 영상 등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비교적 객관적인 증거 자료에 속한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이 같은 영상 기록물도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심지어 피해자가 제출한 CCTV나 블랙박스 영상도 한 번 제출하면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되돌려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 여성은 “피의자에게는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피해자는 과연 어떻게 보호해 주는지 사법부에 물어보고 싶다”며 “피해자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회복적 사법과 실질적인 정의 구현을 위해 앞으로도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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