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민사사건이 형사사건화 되는 현실 극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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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 법무법인 시우 대표변호사“돈을 꼭 받아야 하는데, 일단 형사고소부터 해주시면 안되나요?”

변호사로서 상담을 하다 보면 종종 듣는 질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논리적으로 조금 이상하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한 민사사건의 형사사건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민사사건이 형사사건화 되고 있다는 것은, 민사사건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나 분쟁이 민사절차가 아닌 고소나 고발을 통한 형사절차에서 해결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어찌보면 채권추심기관처럼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가 이러한 문제를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사사건의 형사사건화 경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가속되고 있다. 이제는 어느새 ‘분쟁은 일단 고소나 고발로 해야한다’는 왜곡된 법 관념까지 우리 사회에 팽배해진 것 같다.

생각건대, 민사사건이 형사사건화 하는 문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다음 몇 가지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첫째, 민사소송이 제기되면 첫 기일이 지정되기 까지 최소 2, 3개월이 소요되고, 1심 재판 결과가 나오는데도 적어도 5, 6개월 이상 소요된다. 이 때문에 신속한 결과를 원하는 당사자로서는 민사소송을 꺼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사법부도 재판 지연에 대한 문제를 공감하고 대책 마련을 위해 애쓰는 것 같지만, 한때나마 신속한 재판으로 정평이 나 있던 우리나라 법원의 세계적 위상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 고소나 고발을 하게 되면, 피고소인이나 피고발인이 형사처벌을 받을 것을 걱정해 합의금을 줄 것이라거나, 적어도 민사소송만 제기하는 것보다 고소·고발인의 협상력이 높아질 수 있다고 믿는 당사자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재산 범죄를 다루는 수사관 중에는 사건 처리의 편의를 위해 고소인과 피고소인 간의 합의를 종용하거나 중재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결국 고소나 고발을 남발하게 하는 유도제가 된다.

셋째, 민사절차를 통해서는 증거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영미 국가처럼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질 않고 있기 때문에 민사소송의 당사자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증거가 아닌 이상 상대방이 선별적(?)으로 제시하는 증거에 의존해서 재판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서는 증거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상대방이 증거를 내놓지 않으니 아무리 억울해도 그 소송에서 이길 방책이 없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공권력으로 알아서 증거를 확보해 주니 당사자로서는 나중에 민사소송에서 사용할 증거를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형사절차를 이용하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러나 민사사건이 계속해서 형사사건화 되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민생수사의 속도가 더뎌지고 있는 현실에서 경찰의 수사부담이 더 가중될 것이고, 결국엔 우리사회가 부담해야 할 시간과 비용의 낭비가 가속화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소·고발을 남발하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피고소·피고발인에 대한 인권 침해는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된다,

민사사건의 형사사건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 법원이 공정하면서도 신속하게 재판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보완과 개선이 이루어야 한다. 헌법이 명시한 대로 우리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헌법 제27조 제3항).

둘째, 형사고소나 고발을 남용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적극적으로 형사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 형사소송법은 고소·고발권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무죄 또는 면소 판결을 받고 고소·고발인에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 그 고소·고발인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는제도를 두고 있는데, 실제로 형사재판에서 소송비용을 부담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셋째, 고소권을 남용하는 고소·고발인에 대해서는 무고죄를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있다.

넷째, 민사사건에서 증거 확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증거의 편재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영미법상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사사건의 형사사건화 문제가 계속 방치된다면 결국 모든 국민이 그 문제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꼭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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